영남 알프스 9봉 2021년 완등!!
지난가을 매주 수요일은 영남 알프스 9봉 등산으로 채워졌습니다.
산을 오르내릴 때 나의 머리와 가슴에 스쳐지나갔던 것들을 여기에 모았습니다.
지금은 완등자에게 수여되는 기념은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푸하하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사자봉), 재약산(수미봉), 가지산, 운문산, 문복산, 고헌산에 내년에도 나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어요.
2021.09.23. 영축산
'뭐시 중헌디'
라즈기르 영축산을 오르내리시던
그분을 생각하며
반야암 능선으로 영축산을 오른다
정상으로 가는 짧은 코스여서 빡시다
경사길에 힘이 부칠 때면
솔바람이 쉬어가라며 소매를 붙잡는다
저 멀리 장엄한 바위와 소나무
세월을 깔고 앉아 산을 지키고 있다
북으로 신불산과 간월산
남으로 함박등과 시살등으로 이어지는
헌걸찬 능선 가운데에 자리 잡은
영축산에 드디어 올랐다
누구는 산에 올라 말씀을 남겨셨고
누구는 산에 올라 그분을 회상한다
양산 통도사에서 영축산과 재약산을 넘어
밀양 표충사로 걸망을 지고 다니시던
그분의 가벼웠던 발걸음도 눈으로 더듬어 본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다
모두들 잠시 살다가는 이곳
언젠가는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인생
그런 인생에 ‘뭐시 중헌디’
산에 들면 그런 생각들을 해본다
(cf)
-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라즈기르 영축산을 오르내리시던 그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셔요. 그기서 법화경과 화엄경을 설하셨죠.
- "양산 통도사에서 영축산과 재약산을 넘어 밀양 표충사로 걸망을 지고 다니시던 그분"은 바로 법정스님을 말합니다.
2021.10.06. 간월산
보이지 않는 그리움
풀섶에 몸을 낮추어 자라는
용담이 눈에 띄었다
보랏빛 꽃잎 다섯 장
이토록 아름다운 꽃에도
신산한 일상이 있었던가.
용의 쓸개처럼 쓰다는 뿌리로부터
용담이라는 꽃 이름이 나왔으니 말이다
배내봉과 간월산 꼭대기를 지나면 간월재 평전
지난겨울 불기둥 같은 눈바람이 일렁거렸겠지
또다시 가을이 찾아들고
억새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탱글탱글한 햇볕에 은빛 물결이 눈부시다
사람들이 떠나고 어둠이 내리면
저멀리 영롱한 별빛
지구별 억새꽃밭으로 모여들고
밤새 흥건하게 서걱대는 소리
잠 못 이루는 간월이여
2021.10.13. 신불산
눈에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니다
가천 들머리에서 멀리 올려다본다
비를 머금은 엷은 잿빛 구름이
7부 능선까지 덮고 있다
신불산의 신불이 한자로 神佛이라
신과 붓다의 산이로다
신불산에 들며
사랑과 자비를 생각한다
어디에서 나올까, 어디까지일까
착한 사마리아인까지인가
“오른손으로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일까
“천지여야동근 만물여아일체”인가
아, 너무 어렵다
오히려 이것이 맘 편하다
“마당을 쓸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진다”
산구름 속에서는 조금만 멀어져도
물체가 희미해진다
그 경계의 안과 밖
가까이에 가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실은 경계선마저 없다
산에 올라 산을 내려다본다
발아래 저만치 억새꽃도
저 멀리 인가도 모두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우주 먼지도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
신과 붓다의 산, 신불산에서...
2021.10.20.
천황산(사자봉) & 재약산(수미봉)
가을을 붙들고 있다
햇살 가득한 영남알프스
흐드러지게 핀 억새꽃 사이로
다시, 가을이 익어간다.
절정의 사자봉(獅子峰)
영•알 9봉 완등 길에
병아리처럼 모여 인증샷을 날린다
정상석 아래엔 네 명의 젊은이가
기타와 탬버린으로 가을을 붙들고 있다
재약산 사자봉에 서면
영•알의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운문산과 가지산
간월산과 신불산, 영축산
발아래 재약산 수미봉(須彌峰)
가늘게 몸이 떨린다
눈은 더욱 맑아지고
가슴은 막힘없이 툭 트인다
나와 너, 그것
이 굳건한 형상도
시간이 흐르면 변하고 사라져 가리라
“원각도량하처 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 現今生死卽是”
행복한 세상은 어디인가
언제나, 바로 지금
장금(長今)이다
2021.10.27. 문복산
깊어진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영남알프스 막내둥이 문복산
일찍이 문복이라는 노인이
산에 들어와 홀로 도를 닦았던 곳
문복산(文福山)이다
문복산 보물은 당연 드린바위
건장한 코끼리 형상
하늘에 머리가 닿는 직벽 위에 앉으면
행원의 서원이나마 올릴 수 있을까
동남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젊은 시절 낙동정맥 종주 때 올랐던 고헌산
정맥의 마루금이 북으로 내달린다
이제는 자잘한 돌멩이 피해가며 하산길
어디서 곱게 물던 단풍잎 하나
어깨 위로 떨어진다
나의 인생에도 시방
깊어진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cf) 행원의 상징은 보현보살이에요. 주로 코끼리를 타고 있죠.
2021.11.03. 운문산
나중에, 나중에 무엇을 ‘사리’로 남겨야 할까
영남알프스 구름 문이 열리는 운문산
웅대한 지세에 범처럼 웅크리고 있다
일명 호거산(虎踞山)이다
이곳의 제왕 호랑이는
다들 어디로 갔을까
절정의 가을이 찾아든 석골사 계곡
지렁이처럼 꾸불꾸불 끝없이 올라간다
가파른 등로의 햇살은 차가운 듯 따뜻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는
매 순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색깔은 말한다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줄기가 땀으로 흠뻑 젖을 무렵
해발 1,000m 상운암 관음전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올렸다
노장 지수 스님은 출타 중인 모양이다
뜰의 가장자리에 놓인 나무의자
스님을 닮아 깡마른 수행자의 모습으로
건너편 산을 여린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던데
지금 나의 옷 색깔은 어떠한가
나중에, 나중에 무엇을 ‘사리’로 남겨야 할까
2021.11.10. 가지산
칼날처럼 순결한 상고대여!
목구멍까지 숨이 차오를 무렵
정면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저기가 가지산 정상인가
주위에 더 높은 봉우리는 보이지 않는다
중봉(1167m)이었다.
어릴 때 산에 오르는 꿈을 자주 꾸었다
눈앞에 보이는 가장 높은 산을 오르면
그 뒤에 더 높은 산이 나타나고
그 산을 오르면 또다시
더 높은 산이 뒤에 나타나곤 했다
가지산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중봉을 지나 산 너머 산을 향해 오른다
정상 가까운 곳에 이르니
하얀 꽃이 나뭇가지마다 피어올랐다
상고대였다
하얀 목도리를 단단히 둘러맨
가지산 정상에 서서
다시 상고대를 내려다본다
지난여름 폭우의 모습으로 거칠게
우리 곁에 왔다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려갔었지
석남사 옆을 지나칠 때
수승한 법문을 들었나 보다
칼날처럼 순결한 상고대의 모습으로
오늘 다시 돌아왔으니.
2021.11.13. 고헌산
애어 (愛語)
물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여러 하천의 발원지, 고헌산
북사면 8부 능선에서는
동창천이 시작된다
아버님의 고향, 청도군 매전면 동창
나의 고향, 햇살 가득한 밀양
그 동창천이 밀양강으로 흘러든다
고헌산 가슴쯤에 숨어 있는
발원지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산꼭대기는 들머리 외항재에서 멀지 않았다
언양의 진산은 고헌산이다
언양의 옛 이름인 ‘헌양’에서 ‘헌’자를 따고
산이 높아 고헌산이라 하였다
고헌서봉을 왼쪽 옆구리에 두고
가을 산을 내려오며 달리 생각해 본다
고헌산의 ‘헌’이 바칠 ‘헌’자라
칼날 같은 요즘의 세상에서도
내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고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미묘한 향이로다.”
*애어 (愛語) : 따뜻한 얼굴로 친절하게 하는 말